1.
주말에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를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아내의 짤막한 평:
"거장들이 나이 들어서 찍는 소품들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담백하게 하는게 맘에 들어"
2.
(주의: 스포일러 있음 많음)
스크롤 압박...

사진출처: cine21.com, 이하 모든 사진출처 동일
한 '평범한' 가장이 있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식당을 경영하며 성실히 살아 가고 있고, 가족들은 서로 믿고 아끼고 사랑합니다.
어느날 가게에 무지막지한 강도가 들어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는 순간, 이 '평범한' 남자는 아주 침착하게 악당들을 해치워 버립니다. (네, 말 그대로 눈하나 깜짝 않고 파리 잡듯 죽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동네 영웅 local hero'로 포장되어 매스컴을 타게 됩니다. 장사도 더 잘 되고, 가족들도 아빠를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앞서의 강도들과는 존재감의 차원부터가 다른 무서운 사내가 똘마니들을 이끌고 찾아와 주인공의 주변을 맴돕니다. 그는 주인공이 과거에 잘 나가던 킬러라고 주장하면서, 가면을 벗고 자신과 함께 그 바닥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합니다.
주인공은 사람 잘못 본거라며 계속 피하려 하지만, 이들이 가하는 실체적인 위협이 가족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가게에 침입한 강도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전문 폭력집단인) 이들조차 모조리 죽여버립니다. 물론
정당방위죠.
하지만 앞서의 경우와 달리 이번에는
순간이나마 잔혹한 킬러로 돌변한 남편/아빠의 모습과 그가 행사하는 (비록 절대악을 향한 정당한 것이긴 하나) 압도적인 폭력을 직접 목격한 가족들은, 이제 그를 두려워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의 신분을 감쪽같이 속여온 남편/아빠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 와중에, 고등학생인 아들은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괴롭혀 온 학교 짱을 참다 못해 떡이 되도록 패주고, 그 결과 정학을 먹습니다. 그동안은 그냥 농담으로 받아 넘기곤 했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미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 버린 아버지는 아들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평화롭던 가족은 어느 새 크고 작은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처지에 놓입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인공에게, 그의 '형'이라는 자가 전화를 전화를 해서 불러 냅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잡아 떼던 필라델피아로 한달음에 달려간 주인공은, 예전에 자신을 킬러로 활용해서 조직에서 승승장구하던 '형'을 만납니다. '형'은 처음엔 그동안 어디에 있길래 연락도 안했냐며, 반갑게 맞아 주는 척하지만, 이내 속내를 드러내며 주인공을 죽이려 합니다. 주인공이 앞서의 악당(에드 해리스)을 죽이는 바람에 조직 내에서 자신의 입장이 위태로운 상태거든요.
뭐 예상하다시피 주인공은 이들마저 다 죽여 버립니다. 일견 이제 더 이상 이 가족을 괴롭히는 외부로부터의 폭력은 일소된 듯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힘겹게 집에 돌아온 가장. 가족들은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3.
이 영화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그전 영화들에 비하면 잔혹한 장면도 덜한 편이고, 영화를 보고난 뒤 온 몸을 스멀거리는 듯한 불쾌한 느낌도 없는 깔끔한 영화입니다. 뒤늦게 영화평들을 뒤져 보니 이 영화의 플롯을 서부극의 그것과 동일 선상에 놓는 경우가 많더군요. 제가 본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비디오드롬, 플라이, 데드링어, 크래쉬 정도인데 개인적으로 데드링어가 가장 찌꺼분했다고 생각합니다.
4.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명불허전입니다. 주인공인 비고 모텐슨의 얼굴이나 표정은 그가 평범한 가장일 때나 냉혹한 킬러일 때나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대할 때 그렇게 선량해 보이던 그가 악당을 처치할 때는 너무 침착해서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감정 오바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오가는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습니다.
에드 해리스의 악당 연기 또한 출중합니다. 느멀 느멀 점잖은 척 하면서 주인공과 그 가족을 알게 모르게 위협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나쁜 놈이란게 있다면 저런 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윌리엄허트는 젊었을 때는 굉장히 젠틀하고 부드러운 연인 역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는데 나이 들어 머리 벗겨지고 해서 그런지 엄청 느끼한 악당 두목의 역할이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굵직한 그의 목소리가 멜로물에 나오면 꽤나 감미로운데 악당의 캐릭터에서는 정말 나쁜놈 목소리 같군요.

영화 내용 상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역도, 정말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나쁜놈'의 아우라를 철철 뿜어 내고

심지어 아역들마저 자연스러우면서도 임팩트 있는 감정 변화를 훌륭히 표현해 냅니다. 배우 들의 연기력으로 따진 다면 어떤 평자의 말마따나 이 영화에 조연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5.
하지만 가장 주목한 것은 주인공의 아내 역할을 한 마리오 벨로 라는 배우입니다. 연기도 연기지만, 꽤 나이가 들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살아 있습니다. 몸매도 훌륭하시고...
헬렌 헌트 이후 가장 매력있는 아줌마 배우, 라고 꼽고 싶습니다.
근데 약간 당혹스러웠던게, 영화 중간에 이분의 헤어 누드가, 꼭 필요한 장면도 아닌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와 주시더군요. 예전에 크래쉬에서도 데보라 웅거의 헤어 누드가 커다란 극장 화면에 천연덕스럽게 뿌려지길래 적잖이 당황했던게 기억이 나는데... 감독의 악취민가. 데보라 웅거는 머리도 금발이고 거기도 금발이었는데 이 아줌마는 머리는 금발이지만 거기는 검더군요 흠흠.

사실 감독도 적잖이 나쁜 놈처럼 생겼습니다
6.
그런데 이 영화는 출연진들도, 그리 대중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영화팬들이라면 다들 좋아할 만한 연기파들로 꽉꽉 채워져 있고, 데이빗 크로넨버그도 마찬가지로 대중성하고는 거리가 있지만 두터운 매냐 층이 아직 살아 있을 테고, 심지어 '플라이' 같은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하기도 했고(이건 정말 미슽훼리), 근데 그가
전작들에 비해 대중적인 영화를 찍었다고 오히려 매냐들한테는 서운한 소리를 듣기도 했고, 2년 전이지만 깐느에서 상당히 관심도 끌었고... 했는데, 왜 2년이나 지나서 수입이 되었으며, 서울에서 딸랑 두군데서만 개봉을 하는지, 그리고 거의 전혀라고 할만큼 마케팅을 안해서 이런 영화가 걸렸는지조차 사람들이 잘 모르게 했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가더군요.
2005년에 나온 폭력에 관한 의미 있는 영화 두 편으로 함께 꼽혔던 씬씨티의 경우, 어찌보면 이 영화보다 훨씬 난해할 수도 있는 영화임에도(내용이 아니고 스타일 면에서) 즉각 수입이 되어 꽤 폭넓게 릴리즈되면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던데 비하면 말입니다. 브루스윌리스+제시카알바 카드였다고는 하지만 그때만해도 제시카알바가 지금처럼 인기만땅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아내는 이걸 '
이미 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른 경로를 통해 다 봤기 때문일거다'라고 해석하더군요.
7.
그나저나 미로스페이스, 극장 훌륭하더군요.
가든플레이스라고 하는,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자그마하지만 감각적인 3층짜리 건물 2층에 있습니다. 공간도 멋지고 의자, 상영관 내벽 등 시설도 빠질 데가 없구요.
이 정도 극장을 짓고 유지하려면 돈이 솔찮이 들었을텐데, 영화는 계속 관객 안 들게 생긴 것만 틀더군요. 아마 누군가 스폰을 해 주고 있을 듯...암만 봐도 자체적으로 수지 맞추기는 어렵겠더라구요. 제가 이 영화 볼 때도, 토요일 저녁인데도 관객이 십 수명에 불과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우리 부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혼자 온 사람들이더라는 거. 하긴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연인들이 감상하기엔 절대 비추긴 하지만, 이 영화 정도라면 굳이 혼자 봐야할 이유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돌이켜 보면 저도 그전에 본 크로넨버그 영화는 극장에 혼자 가거나 써클룸에서 혼자 비디오로 본 거였습니다.
카메라를 안 가져간 게 아쉬워서 다음날 다시 와서 아내를 모델로, 가든플레이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장 찍으려고 했었는데, 막상 일요일이 되니 서로 귀찮아져서 안 갔습니다. 하여간 미로스페이스, 영화를 좋아하는 커플이라면 저렴하고 알차면서 간지도 나는 데이트 코스로 강추입니다.
홈페이지도 꽤나 감각 있어 보입니다.

실제 건물은 그림처럼 생기진 않았습니다. (더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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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배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창창한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아깝죠...
항상 보면 배트맨보다 악당들이 더 출연료가 비싼것 같았어요. 그나저나 이번 시리즈는 촬영이 거의 저희 집 근처에서 된거 같더군요. 촬영할땐 길막아 놓는다고 짜증났는데 시카고가 새로운 고담이 된 걸 보니 흥미롭습니다.
시카고 근처에 계시는군요. 시카고는 고담이 되기엔 너무 깨끗하지 않나요...^^
팀버튼 감독 시절에는 고담시티가 굉장히 표현주의적으로 묘사되었었는데, 이후 조금씩 바뀌면서, 배트맨 비긴즈 부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도시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