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말에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를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아내의 짤막한 평:
"거장들이 나이 들어서 찍는 소품들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담백하게 하는게 맘에 들어"
2.
(주의: 스포일러 있음 많음)
스크롤 압박...
3.
이 영화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그전 영화들에 비하면 잔혹한 장면도 덜한 편이고, 영화를 보고난 뒤 온 몸을 스멀거리는 듯한 불쾌한 느낌도 없는 깔끔한 영화입니다. 뒤늦게 영화평들을 뒤져 보니 이 영화의 플롯을 서부극의 그것과 동일 선상에 놓는 경우가 많더군요. 제가 본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비디오드롬, 플라이, 데드링어, 크래쉬 정도인데 개인적으로 데드링어가 가장 찌꺼분했다고 생각합니다.
4.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명불허전입니다. 주인공인 비고 모텐슨의 얼굴이나 표정은 그가 평범한 가장일 때나 냉혹한 킬러일 때나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대할 때 그렇게 선량해 보이던 그가 악당을 처치할 때는 너무 침착해서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감정 오바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오가는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습니다.
에드 해리스의 악당 연기 또한 출중합니다. 느멀 느멀 점잖은 척 하면서 주인공과 그 가족을 알게 모르게 위협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나쁜 놈이란게 있다면 저런 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윌리엄허트는 젊었을 때는 굉장히 젠틀하고 부드러운 연인 역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는데 나이 들어 머리 벗겨지고 해서 그런지 엄청 느끼한 악당 두목의 역할이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굵직한 그의 목소리가 멜로물에 나오면 꽤나 감미로운데 악당의 캐릭터에서는 정말 나쁜놈 목소리 같군요.

영화 내용 상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역도, 정말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나쁜놈'의 아우라를 철철 뿜어 내고
심지어 아역들마저 자연스러우면서도 임팩트 있는 감정 변화를 훌륭히 표현해 냅니다. 배우 들의 연기력으로 따진 다면 어떤 평자의 말마따나 이 영화에 조연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5.
하지만 가장 주목한 것은 주인공의 아내 역할을 한 마리오 벨로 라는 배우입니다. 연기도 연기지만, 꽤 나이가 들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살아 있습니다. 몸매도 훌륭하시고... 헬렌 헌트 이후 가장 매력있는 아줌마 배우, 라고 꼽고 싶습니다.

근데 약간 당혹스러웠던게, 영화 중간에 이분의 헤어 누드가, 꼭 필요한 장면도 아닌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와 주시더군요. 예전에 크래쉬에서도 데보라 웅거의 헤어 누드가 커다란 극장 화면에 천연덕스럽게 뿌려지길래 적잖이 당황했던게 기억이 나는데... 감독의 악취민가. 데보라 웅거는 머리도 금발이고 거기도 금발이었는데 이 아줌마는 머리는 금발이지만 거기는 검더군요 흠흠.
사실 감독도 적잖이 나쁜 놈처럼 생겼습니다
6.
그런데 이 영화는 출연진들도, 그리 대중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영화팬들이라면 다들 좋아할 만한 연기파들로 꽉꽉 채워져 있고, 데이빗 크로넨버그도 마찬가지로 대중성하고는 거리가 있지만 두터운 매냐 층이 아직 살아 있을 테고, 심지어 '플라이' 같은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하기도 했고(이건 정말 미슽훼리), 근데 그가 전작들에 비해 대중적인 영화를 찍었다고 오히려 매냐들한테는 서운한 소리를 듣기도 했고, 2년 전이지만 깐느에서 상당히 관심도 끌었고... 했는데, 왜 2년이나 지나서 수입이 되었으며, 서울에서 딸랑 두군데서만 개봉을 하는지, 그리고 거의 전혀라고 할만큼 마케팅을 안해서 이런 영화가 걸렸는지조차 사람들이 잘 모르게 했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가더군요.
2005년에 나온 폭력에 관한 의미 있는 영화 두 편으로 함께 꼽혔던 씬씨티의 경우, 어찌보면 이 영화보다 훨씬 난해할 수도 있는 영화임에도(내용이 아니고 스타일 면에서) 즉각 수입이 되어 꽤 폭넓게 릴리즈되면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던데 비하면 말입니다. 브루스윌리스+제시카알바 카드였다고는 하지만 그때만해도 제시카알바가 지금처럼 인기만땅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아내는 이걸 '이미 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른 경로를 통해 다 봤기 때문일거다'라고 해석하더군요.
7.
그나저나 미로스페이스, 극장 훌륭하더군요. 가든플레이스라고 하는,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자그마하지만 감각적인 3층짜리 건물 2층에 있습니다. 공간도 멋지고 의자, 상영관 내벽 등 시설도 빠질 데가 없구요.
이 정도 극장을 짓고 유지하려면 돈이 솔찮이 들었을텐데, 영화는 계속 관객 안 들게 생긴 것만 틀더군요. 아마 누군가 스폰을 해 주고 있을 듯...암만 봐도 자체적으로 수지 맞추기는 어렵겠더라구요. 제가 이 영화 볼 때도, 토요일 저녁인데도 관객이 십 수명에 불과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우리 부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혼자 온 사람들이더라는 거. 하긴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연인들이 감상하기엔 절대 비추긴 하지만, 이 영화 정도라면 굳이 혼자 봐야할 이유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돌이켜 보면 저도 그전에 본 크로넨버그 영화는 극장에 혼자 가거나 써클룸에서 혼자 비디오로 본 거였습니다.
카메라를 안 가져간 게 아쉬워서 다음날 다시 와서 아내를 모델로, 가든플레이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장 찍으려고 했었는데, 막상 일요일이 되니 서로 귀찮아져서 안 갔습니다. 하여간 미로스페이스, 영화를 좋아하는 커플이라면 저렴하고 알차면서 간지도 나는 데이트 코스로 강추입니다.
홈페이지도 꽤나 감각 있어 보입니다.
실제 건물은 그림처럼 생기진 않았습니다. (더 멋져요)






올블로그 타고 왔습니다. 좋은 영화였지요. 즐거운 감상글 잘 읽었습니다 :)
사실 제가 덧글을 다는 건 중간에 약간 내용상의 오류가 있으신 것 같아서요.. 자막 번역 자체가 애매했던 것 같기도 한데, 주인공의 형이 곤란해진 이유는 주인공이 애드 해리슨을 죽여서가 아닙니다. '다른 거물을 죽이면서' 동시에 애드 해리슨의 눈을 가시철사로 그어버린 거였죠. 시간적으로 봐도 형이 곤란해진 건 애드 해리슨이 죽어버리기 훨씬 전이구요 (게다가 정작 애드 해리슨을 죽인 건 주인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기도 하지요). 이 부분 헷갈리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구요 ^^;
초면에 주제넘게 덧글을 단 것은 아닌지. 저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간판 내리기 전에 내일도 보고 글피도 또 보렵니다 :)
오 반갑습니다. 어쩐지 형이 자기 친동생을 죽이는 동기로서 개연성이 좀 약해 보이긴 했는데, 너무 나쁜놈으로 보여서 크게 신경은 안 쓰이더라구요... 그러니까 주인공은 그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바꾸고 숨은 건가보군요.
홈피에 같은 영화의 감상을 적으셨던데, 트랙백을 남겨 주셨으면 좀더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겠죠? :)
영화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단 그냥 흥분의 기록이라 쑥쓰러워서 트랙백 안 날렸는데 보내주셨네요 ^^; 워낙 나쁜놈으로 보여서 신경 안 쓰인다는 말씀 동감이 가요. 무서워요 아으..
영화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
오 저도 <폭력의 역사>랑 <화려한 휴가>를 연달아 봐소 기분이 묘했었는데 비슷한 감상을 적어주셨더군요~
폭력에 대해 노출되었을 때와 노출되지 않았을 때를 마치 리트머스지로 살짝 대보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참 담백하게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무엇때문에 폭력이 생기고 종식되는 가 보다는,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을때와 그리고 폭력 자체를 드러내게 될때 인간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어서 저에겐 인상깊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