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드디어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봤습니다. 무섭더군요.
2.
사실 요새 제가 담당하고 있는 솔루션(ECM: Enterprise Contents Management, 전사 컨텐츠 관리)이, 북미 지역에서는 EMR(Electronic Medical Records: 전자의무기록)과 연계하여 병원에 공급된 사례가 꽤 있습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아직 유사한 케이스가 전혀 없는데, 이건 저희 회사 뿐 아니라 경쟁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국내 의료IT 업계에서는 이 ECM이 병원에서 쓰인다는 사실 자체가 생소하게 받아 들여진다는 거죠. 이는 국내 병원들의 IT 투자 규모가 영세해서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footnote]가트너 자료에 의하면 leading healthcare provider(선도 병원)라면 매출의 7% 정도를 IT에 투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는데, 국내 병원의 IT 투자는 대형 차세대 프로젝트가 있는 해라든지 이럴 때 3% 정도 수준이고 그 외에는 보통 1%를 넘기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대략적인 추산치입니다 [/footnote] 그보다는 제도의 차이 때문에 외산 솔루션을 국내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은 측면 때문이 더 강합니다.
그때문에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미국의 의료제도에 대해 조금 공부를 해두게 되었었는데요. 우리나라와 미국의 의료서비스 체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Payer & Provider system을 이해해야 되겠더라구요. 즉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 하에서는 병원이 있기 전에 먼저 Blue Cross라든지 Signa라든지 (모두 저희 회사의 SW를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는 고객들입니다 영화에서는 악의 축으로 묘사되고 있죠 -.-;;) 하는 대형 의료보험사들이 있고, 여기에 가입(지정)된 병원들이 HMO(Healthcare Management Organization)을 구성하게 됩니다. 병원들은 자신이 지정된 HMO의 보험에 가입된 환자들에게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여기에 대한 의료비 지급은 보험사가 하는 거죠. 즉 병원은 의료서비스 제공자(Healthcare Provider), 보험사는 의료비용 지급자(Healthcare Payer)가 되는 겁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도 병원들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건강보험관리공단이 의료수가를 지급하기 때문에 Payer & Provider syste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footnote]말하자면 미국과 마찬가지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와 의료비를 지급하는 주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거죠[/footnote], 우리나라는 모든 병원들이 의무적으로 국가 보험에 지정되어 있어서(당연지정제) 국가의료보험 가입자라면 누구나 상관없이 [footnote]즉 모든 대한민국 국민 - 돈이
이에 반해 미국 의료보험 체계에서는 일단 돈이 없으면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없고 고로 의료서비스도 받을 수 없으며 (엄청난 돈을 내면 가능... 그런데 그런 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면 애시당초 의료보험에 들었겠죠) 의료보험에 들었다 하더라도 이게 보험료에 따라 여러 등급인지라 싼 보험은 증상에 따라 치료비 지급이 되는 범위가 무척 좁아서 지급 대상이 아닌 병에 걸려 병원에 가면 아무 소용이 없다, 는 겁니다. 그 뿐 아니라 바로 집앞에 있는 병원이라도 자기가 가입한 보험의 HMO에 소속된 병원이 아니면 치료를 받을 수가 없는 거구요. 우리나라는 이건희 회장이나 정몽준 의원이나 회사원인 저나 저의 부양가족인 제 부모님이나 노점상 아저씨나 청소부 아줌마나 가입하는 보험의 종류와 그 보험이 보장해 주는 질병의 종류/범위가 똑같죠. 다만 보험료는 소득/재산 정도에 따라 차등으로 내는 거구요. 물론 많이 벌 수록 많이 내는 건데, 개중에는 지금 청와대에 입성해 계시는 모모 인사처럼 수백억에서 수천억을 오락가락하는 재산을 소유하고 계시면서도 건강보험료는 딸랑 만 이천원인가 밖에 안 내셨던 분도 계시긴 합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바는 최근 이메가 정부가 추진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 국가의료보장 체계
3.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런저런 이유로 나름 미국의 의료보험 체계에 대해 아주 약간의 사전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대충 자료 등을 통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이 실생활에서는 저런 의미를 갖게 되는구나, 하는 대목이 많았구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동안 봤던 자료들은 우리 회사 입장에서 고객 즉 환자가 아니라 보험사와 병원들에게 주는 benefit을 설명하는 것들이라, 미국의 의료 체계를 일단 당연한 걸로 인정하고 그 system 하에서 어떻게 업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만 설명하는 것들이었거든요. (IT 솔루션 벤더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제도가 바뀌고 시장이 움직이면 그에 맞는 솔루션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 뿐이지요) 그런데 이게 환자 특히 서민인 환자 입장에서 따져 보면 아주 골 때리는 시스템이라는 거죠.
4.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에 여러 해 전에 개봉한 덴젤 워싱턴 주연의 "존큐"라는 영화가 계속 생각이 나더군요.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본 건 아니고... 해외 출장을 무척 자주 다니던 시기라 오고 가는 비행기 안에서 드문 드문 보다보니 세부적인 내용은 많이 놓쳤었습니다. 아마 덴젤 워싱턴이 직장에서 어이없이 잘렸는데 바로 그날인가 담날인가 아들이 야구하다가 쓰러졌는데 이게 당장 수술을 안하면 얼마 못살고 죽는 병인데 보험사에서는 직장 잘림과 동시에 보험가입도 해지된 거라고 지급을 거부하는데 미국 병원은 보험사가 지급 승인 안해주면 주사 한방 안 놔 주는데 수술비는 장난이 아닌데 이래저래 모금도 해보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려 애써 보지만 택도 없는데 그러는 사이 아이는 점점 죽어 가는데 야마 제대로 빡 돌아 버린 이 착한 생활인/가장은 어쩔 수 없이 총을 들고 병원을 점거해서는 당장 수술해서 우리 아들 살려 내라고 요구를 하는데...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에 이 영화는 여간해서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기내 상영으로 봐서 그렇기도 하지만 극중의 상황이 영 이해가 안 갔었거든요. 아니 세계 최대의 부국이자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과연 백주대낮에 저렇게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가? 라는 생각에 영 실감이 안 났었던 거죠. 식코를 보고나니 그때 존큐가 총을 잡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 이해가 가더군요.
5.
또 생각나는 영화는 항상 최고의 영화만을 내놓는 픽사의 영화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인크레더블"이었습니다. "존큐"와는 달리 이 영화는 극장에서도 여러번 보고 DVD로도 여러번 봤는데요.
슈퍼히어로를 더이상 반기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부의 rehabilitation program으로 보험 회사에서 일하게 된 Mr. 인크레더블이, 불쌍한 할머니에게 보험료 지급 승인을 해줬다가 상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는, 분을 참지 못하고 뛰쳐 나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분이 고객(보험가입자)은 발톱의 때만큼으로 여기고 오로지 주주 이익만을 역설하다가 Mr. 인크레더블에게 떡이 되는 상사 캐릭터신데요, 이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저로서는 이런 시스템이 조금 이해가 안 갔습니다만, "식코"를 보고나니 아 저런게 미국 서민들이 일반적으로 보험회사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였구나, 라고 떠올리게 되었죠.

6.
어쨌거나 영화는 꽤 볼만합니다. 마이클 무어가 끊임없이 제기하는 이런 저런 문제들은 이메가 정부 치하의 2008년 대한민국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거든요. 영화를 보면서 문득문득 아 저런 비판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에도 너무 들어 맞는 내용이 아닌가,
그런데 "식코" 예고편에서 나오는 WHO healthcare service ranking (1인당 의료비 지출이 세계 최고인 미국이 쿠바보다 불과 2계단 위인 39위에 랭크되어 있죠)을 보다 보니 문득 우리나라는 저 랭킹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궁금해지더군요. 그래서 찾아 보니 58위네요. 으음... 실망이군요. 우리나라는 최소한 돈 없어서 치료 못 받을 걱정은 미국보단 덜 하니깐 그래도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역시 의료 기술이나 장비/시설의 낙후함 때문일까요? 이 랭킹에는 190개 국가가 나래비 세워져 있는데 참고로 북한은 167위입니다. 그 아래로는 소말리아 앙골라 나이지리아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개뿔) 등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포진해 있는데 190위는 당당히 아시아의 미얀마가 차지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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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낳고 이틀밤 입원 후 받은 $25,000 빌과 한국에서는 매년 하다시피 하는 수면내시경 비용이 $3000 가까이 나온 걸 보니 내가 실직이라도 해서 의료보험이 없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쫘~악 끼치더군. 일단 돈을 낼 수 있으면 서비스의 질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지만, 가격 대비 성능 비는 대단히 낮은 시스템. 아이러니는 보험이 없는 사람들이 아플 때 무조건 응급실(단가가 가장 쎈)로 가서 돈없다고 배째는 바람에 망하는 병원들도 있다는거. 난 영화는 보지 못했는데 도대체 미국 의료시스템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냐? 보험회사겠지?
영화에서는 보험회사와 그들로부터 로비 및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을 수혜자로 묘사하고 있더군...
없던 일로 된듯하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데 요즘 이메가 정부는 미국의 주정부 하나로 편입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