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회사로서 세계 초일류 수준의 규모와 경쟁력을 자랑하는, 그러면서 우리 회사의 SW에 강한 선호를 갖고 있는 모모 기업에, 어제 방문해서 프리젠테이션 및 회의를 가졌다. 이 회사의 전산 환경은 거의 우리 제품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단순한 업무용 SW 수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업무 프로세스 자체가 우리 SW에 맞게 설계되어 있다. 즉 PI(Process Innovation)을 우리 제품을 통해서 한거라고 보면 된다.
최근 새로 부임한 이 회사의 CIO는 실무자 시절부터 우리 제품 도입에 앞장섰던 양반으로, 이번에 다시 그룹 전체의 IT 환경을 혁신하고자 하는 뜻을 세우고 우리 쪽에 콜을 한거다. 이쪽 입장에서야 다시 큰 revenue를 올릴 수 있는 기회이니 당연히 총력을 다해 영업 활동에 나서야 겠지만, 실무 레벨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딜레마라고 할까 모순이라고 할까, 한가지.
기업 전산환경의 업그레이드 혹은 혁신 혹은 개비를 제안하는데에는 정해진 공식이 있다. 대체로 다음의 순서를 따르는데
- AS-IS: 현재 귀사의 업무/전산환경은 이러 이러한데 저러 구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 Trend: 한편 기술 발전은 이렇게 흘러 가고 있으며, 잘 나가는 글로벌 컴퍼니들은 이러이러한 짓들을 하고 있고, 권위 있다는 시장 조사 기관들은 이러저러한 전망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 TO-BE: 이러한 환경 하에서, 귀사는 이러이러한 형태로 업무 환경을 개선하셔야 합니다 - 여기까지는 추상적인 설명
- What we offer: 저희가 공급하는 SW는 이러 이러한 기능과 성능을 제공함으로써, 귀사의 니즈를 충족시켜 드립니다
뭐 세부 사항은 더하거나 뺄 수도 있고 순서가 바뀔 수도 있지만, 큰 틀은 대체로 이러하다고 보면 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AS-IS 와 TO-BE로, IT 컨설팅의 가장 기초적인 공식이기도 하다. 여기서 딜레마.
AS-IS에 문제가 있으니 TO-BE로 가야 한다는게 핵심인데, 가만있자 AS-IS도 우리가 공급한 SW이고 system이 아닌가? 4~5년 전에 고객사가 엄청난 투자를 해서 (SW license 가격과 consulting, 구축 비용 뿐 아니라 업무 환경 개선을 위해 내부적으로 소요된 유형/무형의 비용들) 도입한 시스템이, 이제 와서 보니 이러 이러해서 문제가 많으니, 새로운 시스템으로 개비해야 한다? 물론 그 동안의 기술 발전과 시장 환경 변화 등이 있긴 했으나, 그때 당시에는 분명히 미래를 내다 보는 시스템으로서 기술 발전을 원활히 따라 가고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분명 우리 입으로 (내 입은 아니지만) 떠들었었는데 말야.
그렇다고 고객사의 결정권자들이 이걸 모르느냐. 절대 아니지. 지금 CIO를 비롯해서 실무 레벨의 결정권자인 팀장들도, 대부분 그때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실무를 진행하며 실적을 쌓은 사람들이다. 이전의 project 즉 AS-IS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자신들이 당시에 일을 완벽하게 못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최고경영진으로부터 사내 전산망을 혁신하라는 명령은 떨어졌고(...라기보다는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 표명이 있었고), 이에 대한 필요성은 사내외/상하 조직으로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바 있으며, 필요한 만큼의 예산도 편성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의 과업은 AS-IS와 TO-BE 사이의 gap을 메우는 논리(변명?)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 곁다리를 걸치고 있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뜬금없이도 애브슬라이더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몇년 사이에 몸짱 열풍이 불고 있지만 역시 원조는 미국... 그 중에서도 최고의 관심사는 남녀노소 불문 공히 뱃살빼기. (미국에서는 abdome을 줄여서 ab라고 부른다) TV를 틀면 자주 볼 수 있는 광고 중 하나가, 복근운동 기구 광고다. 진지하게 목표를 갖고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운동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 보일 정도로 체형을 변화시킨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좀더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이라면 몰라도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가죽 째고 호스로 지방흡입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걸 알테지만, 장사하는 입장에서야 알게 뭐람. 이들 광고에는 항상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 먼저 기존에 잘 알려진 운동 기구로 오타쿠 내지는 히키코모리로 보이는 뚱뚱한 모델이 아주아주 괴롭고 힘든 표정으로 낑낑대며 운동하는 장면을 (주로 우울한 흑백 화면으로) 보여준뒤
-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어렵게 운동하지 마세요! 라고 금세 숨 넘어 갈듯한 하이톤으로 외치면서 새로운 운동기구를 소개하는데
- 이번엔 쭉쭉 빵빵에 배에는 王자가 선명한 (미국에서는 six-pack이라고 함), 건강한 모델들이 나와서 아주아주 즐겁고 행복한 표정으로 새로운 기구로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거다
- 물론 마지막엔 재고가 얼마 안남았으니 지금! 바로 전화하시면 얼마를 할인해서 얼마에...(결국은 $nn9.99) 이걸로 끝이냐구요? 아니죠! 운동하고나서 땀 닦을 때 좋은 극세사 수건 기타 등등을 함께! 드려서 n종 세트를 드립니다! 그럼 이걸로 끝일까요? 블라블라...
근데 문제는 해마다 유행이 바뀐다는 거.

이런 걸 아마 Ab-bench라고 부를텐데 예를 들어 재작년에 이게 유행했었다면

작년에는 이렇게 생긴 모양의 ab-slider가 유행을 하더니

올해는 이렇게 생긴 기구가 유행을 하더라는 거다. 이걸 뭐라 그러더라 Ab-chair라고 하든가?
즉 작년에 채널마다 틀어대던 광고 속에서 모델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운동하던 그 기구를 붙들고 올해는 히키코모리가 괴로운 표정으로 씨름하고 있고, 곧바로 나오는 화면에서 쭉빵 모델이 즐겁게 운동하는 기구가 내년에는 다시 흑백화면 속의 안여돼의 차지가 된다는 거다...
더구나 확인은 안해 봤지만 일련의 제품들은 필시 같은 회사들이 해마다 유행따라 제품을 바꿔 가며 출시한 것들일게다. 이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endless loop라니, 자본주의의 위대함이로다.
유튜브에서 이런 류의 광고를 뒤져 보려고 했더니 없네. 이 광고는 이 여자가 집에서 직접 만든 모양이지만(제품도 그냥 집에서 만든 듯...) 어쨌거나 대략 공식은 따르고 있다.
Posted by vincent



